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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나 사랑해?"
몇 번의 연애 경험이 있는 남자라면 아마도 한번쯤은 어떤 여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어봤을 겁니다. 그런데 혹시 그렇게 물어봤던 여자가 누구였는지도 기억나십니까? 정확히 기억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고 그 여자가 그런 말을 했었나 안했었나 가물가물하신 분도 있으실 겁니다.
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할 때 수많은 사랑의 대화를 나누겠지만 그걸 전부 다 기억하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죠. 혹 가슴 아픈 이별을 했다면 그 또는 그녀에 관한 아주 작은 기억들조차 모조리 지워버리려 애쓸 겁니다. 그가 준 선물, 그녀와 찍은 사진, 주고 받았던 편지들, 함께 했던 순간의 기억들, 심지어 그 사람의 얼굴까지 가능한 한 다 지워버리려 하지요. 그런데 도저히 잊혀지지도 않고, 잊었다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불쑥 그녀를 기억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. 바로 '그/그녀가 했던 말'입니다.
앞서 예로 들었던 "나 사랑해?" 같은 그런 뻔하고 흔한 말은 결코 아닙니다.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,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말. 그런 말이 있습니다.
영화 <번지점프를 하다>에서 젊은 대학생 커플인 인우와 태희는 어느 날 함께 등산을 갑니다. 그리고 산중에 있는 한 식당에 들어가 산채비빔밥을 시킵니다. 밥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숟가락을 요리조리 보면서 장난을 치던 두 사람. 그런데 그때, 태희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.
태희
(숟가락 뒤집으며 장난 치다가 문득)
아! 인우 너 국문과지?
인우
응..왜?
태희
나 어릴 때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,
젓가락은 ㅅ 받침이잖아?
근데 숟가락은 왜 ㄷ 받침인거야?
인우
(당황)어-?
태희
수에 ㄷ 받침한 글자가 하나라도 더 있으면 내가 말을 안해-
근데 국어 사전 찾아보면,
숟가락- 딱 하나밖에 없거든?
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가면서까지 왜 굳이 ㄷ 받침을 한거야?
어차피 발음도 똑같은데, 숟가락도 그냥 ㅅ 받침 해도 되잖아-
인우
어? 어,그건.....음... 젓가락은..
(젓가락 들고) 이렇게 집어먹으니까 ㅅ 받침이고..
(숟가락 들고)숟가락은.. 이렇게 퍼먹으니까 ㄷ 받침하는거야...
(숟갈 들어 보이면서) 봐, ㄷ자처럼 생겼잖아..
태희
(썰렁하다는 표정으로)
..너 국문과 맞어?
인우
(창피)어,야.. 그건...
그건 4학년 돼야 배워..
태희
(어이없다는 웃음)뭐..?
하는데 산채비빔밥이 나온다.
인우, 잘됐다- 싶어서 얼른 쓱쓱 비비기 시작한다.
인우는 후딱 비볐는데 태희는 늦다.
인우
(보다가 자기 것과 바꾼다) 이거 먹어.
태희
(생긋)고마워. (먹는다)
인우
(또 얼른 비벼서 한 입 가득 넣고 먹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)
아,있다!
태희
??
인우
수에 ㄷ받침한 낱말, 숟가락 말고 또 있다!
태희
그래? 뭔데?
인우
숟갈-!
태희
(어이없어 하다가 웃고 만다)
인우
헤-
맛있게 먹기 시작하는 두 사람.
<번지점프를 하다>가 개봉한 2001년에 저는 27살이었는데 27년을 살면서 숟가락으로 밥을 먹어왔었으며, 심지어 국어국문과를 4년 동안 다녔던 저로서는, 그녀의 이 질문이 정말 충격적이며 신선했었습니다.
젓가락은 ㅅ받침인데 숟가락은 왜 ㄷ 받침인가.
<번지점프를 하다>을 보고 난 후 전 가끔 숟가락으로 밥을 비벼먹을 때마다 이 질문이 종종 떠오르곤 했습니다. 뭐 지금도 이따위(?) 포스팅을 쓰고 있으니 마찬가지겠죠. 누구나 하루 세 번이상은 보게되는 물건이 숟가락이다보니 "숟가락의 받침은 왜 ㄷ이야?"라는 질문이 자꾸 생각나게 된 것이죠. 그리고 나중에 네이버 검색을 통해 숟가락 받침이 왜 디귿인지 알게 된 이후에도, 숟가락 받침이 디귿인 이유는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. 그런데 여전히 숟가락을 볼 때마다 "그래, 숟가락 받침이 왜 디귿이냐고 그런 엉뚱한 질문을 했던 여자가 있었지. <번지점프를 하다>에 나오는 이은주(극중 이름은 인태희) 그 여자..."라는 그 기억만큼은 지워지지 않고 아직도 제 머릿속에 남아있는 겁니다. 하핫!
영화 속 주인공 인우(이병헌)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. 밥 먹을 때마다 숟가락을 볼 때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겠지요. 심지어 그녀는 안타까운 사고로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, 그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인우의 가슴은 무척이나 아렸을 겁니다. 그런 아픔은 십 몇 년의 세월로는 쉽게 지워지지 않으니까요. 그러니 17년 후, 아직도 태희에 대한 아린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인우 앞에서, 태희가 했던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인우은 얼마나 덜컹! 심장이 주저않았을까요.
수업중인 교실. 칠판에
바라다 → 바램(X), 바람 , 사둔(X) → 사돈 등의
판서 내용이 쓰여 있고
인우
(칠판에 써가면서 설명)
또 많이 틀리는 말이 ‘틀리다’와 ‘다르다’야-
‘나랑 넌 틀려’- 이건, 틀린 말이야.
‘나랑 넌 달라’ 이렇게 말해야 맞아.
‘틀리다’는 건 ‘wrong'이고, ’다르다‘는 건 ’different' 니까-
또 ...
현빈
(뒤에서) 근데 숟가락은 왜 ‘ㄷ’ 받침입니까-?
엉뚱한 질문에 아이들은 힘도 없이 헤- 웃는데
인우 얼굴이 순간 돌처럼 굳으며
분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“딱-!” 소리를 내며 두동강 난다.
생각 없이 헤헤- 웃던 아이들, 깜짝 놀라고.
인우,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돌아보지도 못하는 채로.
인우
(애써 침착하게)..누구야...?
인우, 애써 표정을 누그러 뜨리며 천천히 돌아보면
맨 뒷자리의 현빈이 난처한 얼굴로 한쪽 손을 반쯤 들고 있다.
인우
임..현빈...
현빈
(난처한)..죄송합니다..
인우
(침착하려 애쓰며)그게.. 왜 궁금하지?
현빈
그냥.. 궁금했습니다..
젓가락은 ㅅ 받침인데 숟가락은 ㄷ 받침인게 재밌어서요..
죄송합니다...
인우, 현빈을 뚫어져라 본다.
넋이 나간 사람 같다.
그날 밤, 인우는 서재에서 국어사전을 펼쳐놓고 '숟가락' 페이지를 봅니다.
17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에도, 인우는 아직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걸까요?
물론 아닙니다. 다른 한 손엔 태희사진을 들고 들여다 보면서 담배를 뻑뻑 피우는 인우의 머리속엔 온통 사랑했던 그녀 태희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차 있습니다. 어떤 말은 한 사람의 기억속에서 영영 지워지지 않고 각인됩니다.
"젓가락은 ㅅ 받침인데, 숟가락 왜 ㄷ 받침이야?"라는 질문은 "너는 나를 왜 사랑하니? 라는 질문처럼 쉽게 답을 말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. 구지 이유를 설명하자면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, 구지 정확한 답을 꼭 말해야하는 그런 질문은 아니니까요. 사람이 사랑을 하는데, 무슨 이유가 있고 정답이 있겠습니까. 사랑하는데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?
<번지점프를 하다>라는 제목처럼, 주인공 인우는 사랑했던 그녀 태희가 환생한 존재임이 분명한 현빈과 함께 뉴질랜드로 번지점프를 하러 갑니다. 그리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면서 우리가 쉽게 답할 수 없는 "너는 나를 왜 사랑하니?"라는 질문에 대해 이런 대답을 남깁니다.
"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
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
당신을 사랑합니다..."
P. S.
'숟가락과 젓가락'에 대해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제가 미리 퍼왔습니다.
출처는 네이버 어학사전입니다.
맞춤법/표기법(6건)
재밌게 보셨으면 공감과 덧글 좀 남겨주세요^^;
오픈한 지 한 달도 채 안 되는 신생아기 블로그인데
공감과 댓글이 너무 안달려 기운이 안 나네요ㅠ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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